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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으로 유명한 연상호 감독의 '창'을 보았습니다.

영화는 아니고, 애니메이션입니다.


연상호 감독의 제품은 보고 나면, 항상 불쾌합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도 보고 나면 찝찝하고 불쾌한 느낌에 가슴이 답답한데

연상호 감독의 작품도 김기덕 감독 작품만큼이나 불쾌하고 찝찝한 느낌이 듭니다.


'창'은 군대 이야기입니다. 3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이야기입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군생활을 FM으로 하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정철민)은 분대장 겸 분대 왕고입니다.

주인공 분대 생활관은 부대 막사 구석에 위치해 있습니다. 생활관 문은 '창' 없습니다.

분대에 신병이 옵니다. 이 신병은 흔히 말하는 고문관입니다.

훈련이 있던 어느 날, 주인공 분대가 나가 있던 훈련지로 사단장이 옵니다.

사단장이 군장을 검사하던 중, 고문관 신병의 군장 속이 비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참들은 다 군장을 제대로 챙겨왔는데 막내가 꾀를 부리다 사단장에게 걸린 것이지요.

부대로 돌아와 주인공은 신병에게 폭행을 가합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신병은 화장실에서 커터칼로 손목을 긋습니다.

자살 미수. 피도 얼마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자살 소동을 알게 된 대대장은 주인공을 영창에 보냅니다.

자살미수 사건을 조사한 결과, 부대에선 생활관에 '창'이 없어 통제가 안 돼 벌어진 일이라며 생활관에 '창'을 만듭니다.

그렇게, 주인공의 군생활은 끝납니다.

제대하는 날, 주인공은 신병에게 묻습니다. '너 지금 편하냐?'

신병은 울면서 소리칩니다. '~병장님하고 있을 때보다 편합니다.'


연상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창'이 본인의 이야기라고 밝혔습니다.

자신이 극 중 주인공의 입장으로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연상호 감독의 그 이야기가 저의 군생활을 떠오르게 합니다. 


고문관, 폭력, 자살. 저의 군생활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문관이었던 신병, 그 신병에 대한 갈굼과 은밀한 폭력, 그리고 신병의 자살.

다만 저의 이야기속에선 자살미수가 아니라 자살이었습니다.


군입대 한 지, 5개월 즈음. 이등병 노릇에 조금 익숙해진 그 때 즈음, 후임병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임병은, 흔히 말하는 고문관이었습니다. 선임들의 갈굼이 시작되었습니다.

잘못이 없어도 혼나는 게 이등병인데, 고문관에게야 오죽하랴. 

고문관 신병은 저의 부사수였습니다. 나름 빠릿빠릿하다고 인정받던 이등병이 고문관 후임병으로 인해 함께 갈굼을 받습니다.

나 하나 살기도 힘든데 왜 저 놈은 나까지 힘들게 하나. 그 아이가 너무 미웠습니다.

차마 욕을 하거나 때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병에 대한 폭언과 폭행에는 눈을 감았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저는 직접 그 신병이 폭행을 당하는 장면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저 폭행이, 저 아이로 인해 저에게까지 닥쳐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병은 자살했습니다. 

저는 그 신병의 자살현장을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자살한 병사의 사수이자 최초 발견자!

부대의 간부들은 처음엔 저를 위로했습니다. 놀랬지, 사람 잘못 만나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런데 부대 징계위원회의 선고는 영창 10일. 부대장님께서 자애롭게도 7일로 깍아주었습니다. 

사건의 책임자는 분대장이나 중대장, 소대장이 아니라, 자살병사의 3개월 선임인 이등병 5개월차인 저였습니다.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이 헌병대로 실려 갔습니다. 헌병대서 만난 법무관은  과한 것 같다며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제겐 1년 6개월의 군생활이 남아 있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주인공은 고문관 병사에게 분노합니다. 제대하는 날까지, 엔딩장면에서까지 주인공은 고문관을 증오합니다.

저는 아니었습니다. 죄책감, 자괴감, 창피함, 두려움, 뭐 이런 감정들이었습니다.

차이가 뭘까요. 자살미수였느냐, 자살이었느냐일까요? 주인공과 저의 성격차이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본인의 폭행이 잘못이나 죄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고문관은 맞을 만 했고, 고문관은 돼도 않는 자살미수로 여러 사람 군생활을 꼬이게 만든 놈이었으니까.

폭행에 눈을 감았던 저는, 군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그 죽음은 내 책임이라며 자책했습니다.

그 신병으로 인해 군생활이 꼬였지만, 군생활만이 아니라 제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지만 그 신병에 대한 원망은 생기지 않습니다.


'창'의 주인공 정철민과 나는 뭐가 다른 걸까. 잘 모르겠습니다. 

군대와 폭력에 대한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며 답답해지기만 할 뿐입니다. 



Posted by 눈감기 시워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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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16 07:42 g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천성이 착한분. 여린분 같아요.

"예수님이 칼을 들면 칼로 망한다고 말한 것은 도덕적 개념이다. 예수님이 폭력을 안 썼나. 성전 뒤엎고 난리를 치셨다. 폭력 쓰셨다. 칼을 쓰면 안 된다는 말씀을 따르자면, 북한이 쳐들어올 때 어떻게 하나. "나 잡수쇼"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인가. 김정일 체제는 자나 깨나 한반도를 적화통일하려고 한다. 막지 않으면 내줘야 한다. 이런 걸 용납하는가. 주체사상에 물든 이들 입장에선 "웰컴 김정일"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실태를 잘 아는 국민 대다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에선 내려오는 이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무슨 힘이 있었나. 무기 들고 싸울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맛세다 전투에서 끝까지 로마군에 무력으로 저항하다 전멸했다. 예수님은 실제 정치 현장에서 군대를 조직할 힘이 없었다."

"국가 없이 신앙이 있나. 무신론자들이 쳐들어오면 신앙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순교밖에 없다. 적을 막기 싫으면 내 목숨을 내놓는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로 알려진 한기총 최희범 총무의 말들이다. 반공주의와 전체주의뿐인 이말들을 목사, 더군다나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기독교단체의 총무라는 사람이 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그동안 한기총의 행보를 본다면 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난 일은 아니니 놀랄일은 아니다. 그래도 놀랄 수 밖에 없는 내가 순진한 건지. 저렇게나 또렷한 반공주의와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건 기독교는 커녕, 불교, 이슬람에도 없다. 어, 어쩌면 요즘 신학의 주류가 그런건지도 모른다. 나보다야 목사님이신 최희범 총무님이 이런쪽에야 밝으실테니까.

예수는 마지막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들에게 순순히 잡혀갔다. 자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군지도 알았지만 예수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고 그의 발도 씻겨주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가 평화를 행한 사람으로 아는데, 한기총의 총무는 아닌가보다. 최총무가 예수도 폭력을 행한 적이 있다고 한 그 장면, 예수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가?? 나는, 또 대부분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때 예수가 그렇게 분노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케하기 위해, 즉, 자신의 믿음에 따른 행동이었던 걸로 아는데, 잘못 알았나보다. 그일로인해 예수는 이득을 보기는 커녕 더 거세게 반대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렇게 '폭력을 행하던' 예수가 정작 자신을 잡으러 온 군사들에겐 순순히 잡혀서 끌려갔다. 폭력으로 그를 구하려는 제자를 만류하며, 되려 '적'을 치료해주는 이상한 행동을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믿음에 따라 그런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다음말은 더욱 놀랍다. 예수가 힘이 있었다면 군대를 조직해서 싸웠을 거란다. 군대를 조직해서 싸운다함은 예수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와 싸웠을 거란 소린가? 이런 재밌는 성서해석을 하는 분이 왜 한기총의 총무로 머물러 계신지 모르겠다. 이쯤이면 정명석님정도되는 일가를 이루실 수 있을 법도 한데.
결국 이 분은 예수는 군대를 조직할 힘이 없어서 로마와 싸우지 못했고 결국 로마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믿음을 갖고 계신 셈이다. 그렇게나 무능력하고 별볼일없는 2천년전 저 중동의 목수출신 사이비교주를 여지껏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게 쉬운일이 아닐거란 생각을 해보면 이분의 믿음이 얼마나 굳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나라면 그렇게나 무능력한 신이라면 내팽개쳐 버릴텐데. 이렇게보면 최총무님이 믿는 하나님은 참 생각도 없으신 듯 하다. 로마와 싸워 이기라고 아들을 보냈으면 군대도 같이 보내던지, 아니면 최소한 왕으로라도 보내지 겨우 목수따위로 보내서 아들 목숨을 잃게 만드시나 그려.

최희범 촘무님의 말씀들을 보며 성경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런 주류의 흐름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끝으로 최희범 총무님께 믿음을 위해 복숨을 버리는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순교임을 알려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드리고 싶다.
Posted by 눈감기 시워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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